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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얼빈_일제 시대를 사는 이들의 立場 차이

    by codingBearInPlayground 2022. 9. 13.

     김훈은 1인칭 역사 소설의 장인이라 본다. 역사 속 인물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듯 그의 역사 소설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 살아서 이야기하는 듯하다. 작가의 대표작 '칼의 노래'에서는 정쟁과 전쟁에 휘말린 인간 이순신의 피로한 속내를 이순신이 살아돌아와 독백을 하듯 실감나게 풀어냈다. 이번 작 하얼빈에서는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이야기를 썼다. 짐작건대 일제 시대를 살아가는 각 인물들의 입장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대비시켜 보여주려고 한 의도가 아닌가 싶다. 소설은 각 등장인물들의 시점을 한 장마다 풀어내는 식으로 전개된다.
     일제 시대만큼 史觀이 엇갈리는 주제가 있을까. 조선은 자력갱생을 하여 근대화를 할 수 있었으나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면서 그 기회를 앗아갔다는 자본주의 맹아론 내지 식민지 수탈론, 일제 덕분에 조선의 전근대적인 문화를 일신하여 근대적인 산업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 당시 조선 지배층이 제국주의와 개항의 흐름에 잘 대응했는지, 조선의 국모를 민비라 칭해야 하는지 명성황후라 칭해야 하는지, 동학과 갑신정변의 의의는 무엇인지, 위안부 할머니들 혹은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인권 유린을 당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책임은 없었는지 등 일제 시대라는 큰 틀을 아래 놓인 세부 주제에 대해 각계 각층에서 의견들이 대립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의 생각을 들여다본다면 '일본은 절대 惡이고 조선은 절대 善이다'라는 사관으로 합의되었다 볼 수 있다. 이러한 사관에만 입각하여 이번 작품을 읽는다면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번 작품은 소위 말하는 '국뽕 판타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도래한 일제 시대를 각자의 사정에 맞게 살아가는 인물들을 그려놓은 '입장문'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역사 소설이 아니라 시대상을 그려낸 관찰기로 바라본다면 일제라는 단어가 초래하는 마음 속의 분노를 조금은 가라앉힌 채, 차분하게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나를 지배한 감정은 바로 '경외심'이다. 일제 시대는 단순히 나라의 통치권자들이 바뀐 수준을 넘어선 제국주의라는 시대의 거대한 흐름이었다. 그 탄압적인 시대에 맞서 안중근은 싸웠다. 안중근도 지금에 와서야 우리 국민들에게 영웅이자 義士로 칭송받지만 당시에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인간이었다. 나약한 인간이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맞서겠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걸린 사고의 과정을 나는 더듬을 수가 없다.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인다고 해서 일제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안중근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을 벌이고 나면 그 이후의 삶은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일제에 저항하게 만들었을까. 소설 속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는 일이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인듯 자연스레 목표를 달성한다. 결과를 놓고 보면 이토가 총살을 당한 이후에 그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일제는 물러가지 않았고 괜한 외교적 분쟁을 일으킨다며 조선의 지도부 및 일반 국민들 가운데서도 어리석은 짓을 했다며 비난을 일삼는 자들도 있었고 안중근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벌인 일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의 자식들에게 사과까지 했다. 그렇다면 안중근의 목적은 대한민국의 독립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동양평화를 해치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이루고픈 동양평화의 질서를 해치는 일제를 이토 히로부미라는 개인에 투영하여 없앴던 것이리라. 한 개인이 국가에 저항을 하지만 결국 국가의 폭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마는 한 개인. 제국주의를 소재로 삼은 각종 매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 구조이다. 안중근은 그렇게 뤼순 형무소에서 동양평화론으로 자신의 뜻을 후대에 전하며, 목적은 달성했으나 결과는 얻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안중근이 원하던 조국의 독립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하며 시대가 시대를 밀어내는 형태로 이뤄졌다.
     한국인이라면 분명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대목이 몇 군데 있을 것이다. 난 분노도 분노지만 등장인물들을 속내를 짐작해보며 그저 안타까웠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은 그저 각자의 입장에서 열심히 삶을 살았을 뿐 시시비비는 후대의 손에서 따져지는 것이지 싶었다. 안중근의 뜻도 당시에는 환영 받지 못한 채 뤼순 형무소에서 쓸쓸히 시들었지만 후손들은 그를 귀감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내가 만약 안중근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나는 어떤 立場을 취했을까. 후손들에게 비겁하다 평가 받지 않을 만한 뜻을 관철할 수 있었을까. 아마 보통 사람인 나는 쉽지 않았으리라. 1993년이 되어서야 안중근을 위한 공식적인 추모 미사가 열렸다. 늦게나마 그의 뜻을 후손들이 알아차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그의 뜻은 우리가 몰랐던 날보다 알아서 남겨나갈 날이 훨씬 더 많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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